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운요호 사건 (문단 편집) == 결과 == 9월 28일 [[나가사키]]로 귀항한 운요호의 함장인 이노우에는 사건의 경위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10월 8일 해군성은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공개 발표하였다. 이노우에의 보고서에 따르면 급수를 목적으로 우발적으로 강화도에 정박했고, 운요호는 교전 당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으며, 모든 전투는 9월 20일 하루 동안 발생했다. 하지만 이노우에의 보고서는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고, 최근에는 이노우에가 나가사키에 귀항한 다음 날인 9월 29일에 작성한 최초의 보고서가 발견되면서 아예 조작으로 판명되었다. 2002년에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실에서 발견된 이 최초 보고서에 따르면 운요호는 의도적으로 강화도에 접근하였고, 물이 아닌 해안 측량과 조선 관리와의 면담이 강화도 접근의 목적이었으며, 일본 국기를 계양하지도 않고[* 국기는 강화도 접근 첫날인 20일에는 계양하지 않았고, 다음날인 21일부터 계양하였다.] 강화도 해안에 접근하여 동정을 살피다가 조선군의 포격을 받았고, 모든 전투는 하루가 아닌 3일 동안 벌어졌다. 이노우에가 이렇게 보고서를 날조한 이유는 뒤늦게 운요호의 행동이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 주도의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을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했기에, 운요호의 군사 행위가 국제법상 용납할 수 없는 도발 행위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국제법상 운요호가 한 것처럼 무단으로 타국의 해안에서 측량을 하는 것이 불법이지만, 식수가 떨어졌을 때는 임의로 아무 항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강화도 접근 목적을 바꾸었다. 또한 군함이 타국 영해에서 3일이나 있는 것은 일본이 먼저 전쟁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3일을 하루로 줄여야 했다. 한국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9월 29일에서 10월 8일 사이에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먼저 읽어보고 조작에 대한 자문을 한 것은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와 [[이토 히로부미]]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온건파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운요호 사건의 전말이 "조선이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던 운요호를 의도적으로 먼저 공격했다"라고 왜곡되어 전해지면서 일본 내에 강경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본래 정한론에 반대하던 온건파들도 "당장은 조선 침략에 성공하기 어려우니[* 일본은 조선과의 전쟁은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조선의 뒷배인 청나라가 참전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길어져서 서구 열강의 눈길을 끌어 서구 열강도 [[한입만]]하며 달려든다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었다.] 국력을 더 신장시킨 다음에 조선을 치자"라며 조선 출병 자체는 긍정하고 있었기에, 일본 정부는 일단 조선과 청에 외교 사절을 보내서 문제를 따져보고 외교적 해결에 실패할 경우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은 부산에 3척의 군함을 보내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이어서 1876년 2월에는 강화도로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함선을 보내 조선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묻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